정책

[소버린AI 허와실①] ‘AI주권’ 선언은 충분했다…단계별 실체 따져 전략 수립할 때

오병훈 기자

미국 정부가 자국 AI 기업 앤트로픽의 ‘미토스5’와 ‘페이블5’ 모델의 외국인 접근을 막는 조치를 내리면서 ‘소버린AI’가 다시금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외부 변수로부터 자유로운 국가 차원 AI 운영 권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도 ‘소버린’에 대한 정의조차 불분명하다. 이는 AI가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이 총집합한 거대한 생태계 산업이기 때문이다. <디지털데일리>는 소버린AI에 대한 실체와 동향을 전하고 전문가들과 업계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현실적인 AI 주권 확립 방향을 조명해본다.<편집자>

[사진=제미나이 나노바나나2 생성 이미지]

[디지털데일리 오병훈기자] “저는 소버린AI 에 대해 똑같은 정의를 두번 이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소버린 AI 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고 물을 때마다 사람마다 완전히 다른 답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5일 한국을 방문한 그레고리 알렌 디시전트리리서치 대표가 기자들 질문에 답변한 내용이다. 알렌 대표는 미국 국방부(현 전쟁부) 합동AI센터(JAIC) 전략정책국장을 지낸 AI·반도체·국방기술 정책 전문가다.

소버린AI 담론 자체가 얼마나 불분명한 단어인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실제로 소버린AI에 대해 수많은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아직까지 소버린AI 담론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은 현실이다.

2022년말 생성형 AI 열풍이 전세계를 덮친 이후 특히 한국 내에서 유행처럼 떠돌기 시작한 말이 바로 소버린AI다. 간단히 설명하면 소버린AI는 한 국가나 민족이 외부 변수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AI 운영이 가능해야 한다는 취지의 개념으로 통용된다.

문제는 이 개념이 구체적인 정책 목표로 추진되는 순간부터 해석이 갈린다는 점이다.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를 국내에 보유하는 것을 소버린AI로 볼 것인지, 자국 언어와 문화가 반영된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는지, 혹은 외국 기업의 모델을 쓰더라도 위기 상황에서 끊기지 않는 접근권을 보장받는 것을 뜻하는지에 따라 필요한 전략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소버린AI, 어디서 왔나…韓에서는 정부 AI정책 급물살 타고 확산

소버린AI라는 말은 갑자기 등장한 신조어라기보다 ‘디지털 주권’ 논의가 생성형AI 시대에 맞춰 확장된 개념에 가깝다. 정책적 뿌리는 2010년대 후반 유럽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2018년 ‘유럽에서 만들어지는 AI’ 전략을 제시하며 미국과 중국 중심의 AI 패권 경쟁 속에서 자체 연구·산업·규제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이후 2020년 전후로 데이터, 클라우드, 사이버보안, AI를 포괄하는 ‘디지털 주권’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AI 역시 단순 기술이 아니라 국가가 통제력과 선택권을 가져야 할 전략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다만 ‘소버린AI’라는 표현이 세계적으로 유행어처럼 번진 것은 2022년 11월 오픈AI의 챗GPT 공개 이후다. 생성형AI가 검색, 업무, 교육, 국방, 산업 운영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기반 기술로 떠오르자 각국은 미국 빅테크 모델에 대한 의존이 단순한 산업 경쟁력 문제가 아니라 언어·문화·데이터·안보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국에서는 네이버클라우드를 중심으로 이 용어가 빠르게 확산됐다. 당시 네이버클라우드 AI혁신센터장을 맡았던 하정우 전 AI미래기획 수석의 역할이 컸다. 2023년부터 각종 IT 행사에 연사로 참석한 하정우 전 수석은 무대에 올라 ‘데이터주권’과 ‘소버린AI’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네이버는 2021년 한국어 초거대언어모델 하이퍼클로바를 공개한 뒤, 2023년 ‘하이퍼클로바X’를 앞세워 한국어와 한국 문화, 국내 산업 환경을 이해하는 AI 모델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상황이었다.

하 전 수석이 소버린AI를 유독 강조하고 나선 배경으로는 AI 모델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얻기 위한 명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네이버 입장에서 쟁쟁한 글로벌 빅테크 AI 모델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정부 지원이 절실했던 상황이다. 소버린AI는 ‘자주국가’ ‘AI주권’과 같은 국가차원 어젠다와도 결이 잘 맞았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2023년에는 당시 정부에서도 AI 정책 드라이브를 걸기위한 제반 작업이 한창이던 상황이다. 구체적으로 ‘국가AI위원회(현 국가AI전략위원회)’와 ‘AI 3강국 전략’ 등 국가 단위 AI 정책 추진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글로벌 AI 시장의 빠른 성장과 확산세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 중 하나로 AI 국가 주권의 필요성이 언급됐다.

특히 하 센터장은 이후 대통령실 초대 AI미래기획수석으로 임명되며 민간 기업 중심의 소버린AI 논의가 정부의 국가 AI 전략과도 맞물리게 됐다. 이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을 본격 추진하며 자국 중심 AI, 즉 소버린AI 생태계 확장을 언급한 것도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 분석이다.

글로벌 클라우드제공사업자(CSP) 및 AI 기업의 의존도가 빠르게 높아진 것도 AI 주권 논의에 기름을 부었다. 국내 주요 기업 데이터가 해외 사업자의 데이터센터를 통해 국외 AI 모델에 학습될 수 있다는 우려는 각종 보안 우려와 안보 정책에 AI 주권 필요성을 강화하는 근거가 됐다.

미국 정부의 미토스5·페이블5 수출 통제도 한동안 잠잠했던 소버린AI 논의를 다시 재점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국제 사회에서는 이번 수출 통제가 미국의 중장기적인 수출 전략이라기보단 앤트로픽과 미국 정부의 마찰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의 조치에 따라 AI 접근권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AI 주권은 국가 입장에서 분명 필요한 내용이다. 동시에 정부가 정책 추진 명분을 위한 좋은 키워드였다”며 “정부에서 AI 정책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타이밍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해서 이제는 ‘AI주권=소버린AI’ 공식이 자리잡은 분위기”라고 분석했다.

◆소버린AI, 명분은 좋지만…정책 반영 앞두고 복잡해진 셈법

데이터 주권, AI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소버린AI의 명분과 필요성을 부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AI를 사용할 때 나도 모르는 사이 AI 모델과 주고 받은 데이터가 외국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우려를 잠식시킬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부분 그 취지에 동의한다.

문제는 소버린AI의 담론이 실제 정책 설정 과정에서 논의될 때다. 이는 AI의 복잡한 생태계로 인해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AI는 반도체, 서버, 전력, 클라우드, 데이터, 모델, 서비스가 맞물려 돌아가는 복합 산업이다.

단순히 ‘자주기술’ ‘국산화’라는 구호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모든 단계를 독자 구축하겠다는 접근은 막대한 비용과 기술 격차라는 현실에 부딪힐 수 있고 반대로 외산 기술 의존을 방치할 경우 미국의 이번 조치처럼 핵심 모델 접근권이 외교·안보 변수에 흔들릴 수 있다.

최경진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가천대 법대 교수)은 “각 산업 분야와 생태별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이해관계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소버린AI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 상이할 수밖에 없다”며 “소버린AI라는 단어는 전략적인 단어여야 한다. 선언적이고 불분명한 논의만 지속하기 보다 산업 생태계 단계에서 현실적인 사안을 세밀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기술 생태계, 서비스 특성 등을 고려한 면밀한 AI 주권 확보 전략이 필요해진 시점이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 및 전문가 분석이다. 특히 미국 정부가 앤트로픽의 ‘미토스5’ 및 ‘페이블5’ 수출 통제를 조치한 이후에는 선언적인 수준의 소버린AI 논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단계의 소버린AI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버린AI를 기술 생태계별로, 또 서비스 분야별로 구분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AI가 개발되는 전 과정을 구분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AI 산업은 ‘AI 칩(GPU 및 NPU)-데이터센터-데이터 정제·수집-AI모델 학습-AI 모델 접근권-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로 구성돼 있다. 각 단계별로 AI 주권 확보 가능성과 비용, 리스크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예컨대 AI 칩 영역에서는 엔비디아 GPU 의존도를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 국산 NPU가 어느 수준까지 대체재가 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데이터센터 영역에서는 GPU 확보뿐 아니라 전력, 냉각, 부지, 운영 소프트웨어까지 함께 봐야 한다.

또 데이터 영역에서는 국내 산업·공공·언어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돼 있는지, 이를 학습 가능한 형태로 정제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 있는지가 중요하다. 모델 영역에서는 기초모델을 직접 학습할 것인지, 오픈소스 모델을 활용해 특화모델을 만들 것인지, 혹은 글로벌 모델 접근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집중할 것인지에 따라 전략이 달라진다.

전문가들은 ‘소버린AI의 재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AI 주권을 추상적인 국가주의 담론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인프라 주권, 데이터 주권, 모델 주권, 접근권 주권, 서비스 주권 등으로 나눠 각각의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방·안보·공공 행정처럼 민감 데이터가 오가는 영역에서는 국내 통제 가능한 인프라와 모델 운용 환경이 중요하다. 반면 일반 소비자 서비스나 글로벌 생산성 도구 영역에서는 완전한 국산화보다 글로벌 최고 수준 모델에 대한 안정적인 접근권과 데이터 보호 장치가 더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김숙경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는 “AI 산업은 에너지부터 시작해 칩, 데이터, 모델까지 다양한 산업이 단계적으로 만드는 생태계”라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역량으로 AI 생태계에 관여하는 각 산업이 유기적으로 잘 작동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한국이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독자적인 역량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수준은 어디까지인지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분석했다.

오병훈 기자
digimon@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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