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하는 시내·공중전화에 '사회적 비용' 투입 적절한가

21일 오후 서울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현 의원실 주최로 ‘AI 시대, 국민 디지털 기본권 보장을 위한 정책 과제와 방향’ 토론회가 열렸다. [사진=디지털데일리]
[디지털데일리 강소현 기자]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시내전화 등 ‘보편적 역무’를 재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단순한 통신망 접근을 넘어 디지털 사회 참여를 보장하는 ‘디지털 기본권’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용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는 21일 오후 서울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현 의원실 주최로 열린 ‘AI 시대, 국민 디지털 기본권 보장을 위한 정책 과제와 방향’ 토론회에서 “사회 중심축이 음성통신에서 데이터 기반 정보통신으로 이동했지만 관련 제도는 여전히 과거 패러다임에 머물러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 이용자 줄고, 적자는 커지고…시대 변화 못 따라가는 보편적 역무
보편적 역무는 모든 국민이 언제 어디서나 적정한(affordable) 요금으로 필수 정보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다. 국가가 직접 제공하지 않더라도 민간 사업자가 일정 수준의 서비스를 유지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현재 보편적 역무 상당수는 음성통신, 특히 유선전화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디지털 시대 현실과 괴리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시내전화만 해도 그렇다. 국민적 수요가 크게 줄어든 가운데 적자를 감수하며 보편적 역무로 보장하는 것은 비용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시내전화 사업은 대규모 적자가 누적되고 있는 상황이다. 2023년 기준 KT의 시내전화 사업 영업손실은 약 8200억원, 영업이익률은 -138.2%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SK브로드밴드는 -222억원(-31.7%), LG유플러스는 158억원(32.5%) 수준으로 집계됐다.
이민석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연구위원은 “유선전화 가입자는 2015년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데 시장환경 변화로 자연 쇠퇴 중인 서비스를 기본적 권리로 명시하고 소요되는 비용들을 우리 사회가 보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며 “특히 대규모 적자가 연속되는 서비스의 사업자 손실을 매출 비례로 보전하는 논리의 정당성에도 의문이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곽정호 호서대 빅데이터AI학부 교수도 “전통적인 보편적 역무는 네트워크 접근권 보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지금은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며 “사업자 입장에선 실제 이용 수요가 크지 않은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원 규모의 비용을 들여 마이크로웨이브 설비를 운영해야 하는 만큼, 현행 보편적 역무 범위가 여전히 타당한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통신망 넘어 AI·콘텐츠까지…디지털 기본권 확대 논의
이에 이날 전문가들은 보편적 역무를 디지털 기본권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현재 정보통신서비스 중심인 지원 범위를 OTT와 AI 등 네트워크 기반 부가통신서비스 영역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디지털 기본권의 이론적 토대로 보편적 기본서비스(UBS)와 ‘의미 있는 디지털 연결(Universal Meaningful Digital Connectivity·UMDC)’ 개념을 제시했다. 단순한 인터넷 접속이 아니라 사회·경제 활동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다.
해외 주요국들은 이미 디지털 접근권 확대에 나섰다. 미국은 약 19조원을 투입해 통신요금과 단말기 구매를 지원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도 취약계층과 청년층을 대상으로 디지털 기기 바우처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교수는 “최근 소비자 부담 증가분의 상당 부분은 통신요금보다 단말기 가격 상승에서 비롯됐다”며 “현재 지원 제도는 통신망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기기와 콘텐츠 영역에 대한 지원은 사실상 부재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도 “단순한 통신비 감면을 넘어 단말기와 콘텐츠, AI 서비스까지 고려한 지원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며 “글로벌 플랫폼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고령층·장애인·청소년 대상 AI 리터러시와 디지털 안전 교육을 확대해 디지털 취약계층의 활용 역량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 비용은 누가 부담하나…기금·바우처 방식 제안
보편적 역무를 재정의할 경우 의무 사업자 범위 역시 재설계돼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지금까지 연 매출 300억원 이상 기간통신사업자를 중심으로 비용을 분담해 왔지만, 향후 플랫폼과 AI 서비스까지 디지털 기본권 논의 대상이 된다면 빅테크를 비롯한 플랫폼 사업자도 논의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네트워크 효과에 따른 수혜자와 비용 부담 주체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취지다.
다만 재원 조달 방식에 대해선 기존의 형태를 유지할 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곽 교수는 “챗GPT를 필수 서비스로 지정하는 등 만약 특정 서비스를 필수 서비스로 지정하면 이용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시장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며 “현재로선 기금이나 바우처 방식으로 이용자 선택권을 보장하는 방안이 타당해 보이며 디지털 기본권을 어디까지 보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어르신 대상 음성·문자 지원 확대와 초고속인터넷의 보편역무 포함 등 기본적인 통신 서비스 보장을 위해 제도를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남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통신정책관은 “디지털 기본권과 기본 통신서비스 체계를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개편할 시점이라는 데 공감한다”며 “취약계층 지원과 통신비 부담 완화는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한편 보편역무 개편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또 보편역무의 범위와 재원 조달 방식, 디지털 바우처 등 지원 수단에 대해선 “공론화와 시범사업을 통해 효과를 검증하며 AI·디지털 시대에 맞는 제도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 “보편적 역무는 권리로…재난통신은 별도 관리”
한편 보편적 역무를 단순 규제가 아닌 ‘권리’ 관점에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재난·안전 관련 통신은 일반 보편적 역무와 분리해 별도 체계로 관리해야 한다고도 제안됐다.
이 연구위원은 “현재 디지털 접근권은 물리적 접근 측면은 과기정통부가, 활용 역량 측면은 디지털포용법 체계에서 각각 다루고 있어 거버넌스가 이원화돼 있다”며 “보편적 서비스를 새롭게 정의하고 이를 국민의 권리로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선박무선전화와 같은 안전통신은 이미 해사법과 국제규약에 따라 관리되고 있고, 특수번호 전화 역시 재난안전통신 체계 안에서 운영되고 있다”며 “이러한 분야까지 전기통신사업법상 보편적 역무로 중복 규율하기보다 재난안전 관련 법체계와 정합성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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