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클로즈업] ‘콘텐츠 금융’이 좌우하는 IP 자생력…日·美 사례보니
[디지털데일리 오병훈기자] 한국 콘텐츠 지적재산권(IP) 산업의 자생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금조달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계에서는 최근 한국 콘텐츠 IP 산업이 점차 자생력을 잃고 있다는 우려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 핵심 원인으로 자금조달 구조의 변화가 꼽힌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중심으로 제작비 원금 회수를 보장해주는 투자 방식이 확산되면서 제작사들의 선택지는 좁아지고 있다. 제작비 회수 실패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다수의 제작사가 이를 선호하지만, 그 결과 콘텐츠 투자 주체가 글로벌 OTT로 빠르게 대체되며 국내 자체 콘텐츠 투자 시장은 위축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글로벌 OTT의 대규모 콘텐츠 투자로 한국 콘텐츠 위상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외부 자본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국내 시장 생태계 붕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핵심 선결 과제로 ‘콘텐츠 금융’ 모델이 확보돼야 한다는 분석이다. 구체적으로 글로벌 OTT의 투자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국내 시장만의 투자 및 수익구조(BM) 모델이 확충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한국 콘텐츠 시장 자생력을 높이기 위한 정부펀드 등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부 주도 정책은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 전문가 분석이다. 치솟는 제작비용을 감당하기엔 한계가 있으며 궁극적으로 투자 시장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민간 투자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해외 사례에 주목하고 있다. IP 강국인 일본과 미국 등의 자금조달 방식을 연구해 좋은 것은 한국에도 도입하자는 취지다. 주로 언급되는 것은 일본의 ‘제작위원회’와 미국의 ‘완성보증제도’다.
◆日, 리스크 분산형 ‘제작위원회’
일본은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IP 강국이다. 만화나 웹소설 문화를 기반으로 다양한 애니메이션 장르 시장을 개척해왔다. 그 동력은 변화무쌍한 IP 활용에 있다. 일본 시장에서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방송국이나 OTT에 방영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형태 IP로 진화된다. 그만큼 BM도 다양하고 투자 주체도 다양하다.
다양한 투자 주체를 모으는 중심에는 제작위원회 방식이 존재한다. 제작위원회는 일종의 금융 조합이다. 원작 IP를 중심으로 광고대행사, 굿즈회사, 해외판촉사, 게임사, VOD 플랫폼 등 다양한 투자 주체가 이곳에 참여한다.
조합으로 묶인 참여사들은 파트너십을 맺고 조합을 구성해 공동으로 IP에 출자한다. 투자금 회수 방식도 계약 과정에서 결정된다. 덕분에 어떤 시점에 굿즈를 발행하고 게임을 제작하는 등 구체적인 BM 로드맵이 자연스럽게 설계된다.
공동 출자로 진행되는 만큼 최대 장점은 리스크 분산이다. 참여사 모두가 이익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BM을 구상하고 투자금 회수 전략을 짜는데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제작사가 광고 마케팅 역량이 약하거나 게임·굿즈 등 멀티유즈(Multi-use) 역량이 부족해도 관련 전문기업이 이를 책임지기 때문에 사업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
물론 단점도 있다. 참여사가 많은 만큼 계약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추진 속도가 더디다. 참여사 모두가 이익에 직결된 구조는 참여사 간 이해조정 시간을 요구한다. IP 원작 자체의 책임성도 희석돼 창의성이 저해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국에서는 아동 콘텐츠 ‘뽀로로’가 일본 제작위원회와 유사한 방식으로 제작됐다. EBS와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 아이코닉스, 오콘 등 회사가 공동으로 출자해 흥행에 성공했다.
기획·마케팅은 아이코닉스에서 담당했으며 오콘에서는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동원에 제작에 참여했다. 하나로통신에서는 당시 초고속인터넷 회선의 킬러콘텐츠로 뽀로로를 활용했다. 자사 회선을 이용하는 가입자에게 고화질 뽀로로 콘텐츠를 독점 제공하는 식이었다. EBS에서는 뽀로로 콘텐츠 방영권을 확보했다.
일각에서는 글로벌 협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한국형 제작위원회’를 고민해보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한국 콘텐츠의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만큼 글로벌 협력사와 함께 공동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국내 시장 수익 한계를 극복함과 동시에 IP 활용 가치는 살려내는 방식의 제작비 확보를 위함이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국회 토론회에서 “한국은 제작 역량은 뛰어난 반면 IP 해외 사업 확장 및 마케팅과 네트워킹 역량은 부족한 경향이 있다”며 “제작사가 원작 IP를 기반으로 글로벌 기업의 공동 출자를 유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방법을 고민해 볼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美, IP가 곧 담보 ‘완성보증제도’
미국에서는 완성보증제도(Completion Bond)가 독립 콘텐츠 제작 시장의 핵심 금융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한국이 부동산 등 실물 자산을 담보로 해야 대규모 자금 조달이 가능한 것과 달리 미국에서는 제작 IP 자체가 담보로 인정된다.
제작사는 일정 기간 내 콘텐츠를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배급사가 보증한다. 완성 보증이 성립되면 은행은 이를 근거로 제작비 대출을 실행한다. 제작사는 흥행 리스크를 줄이면서도 IP 권리를 유지할 수 있고, 배급사는 흥행 성공 시 보증 수수료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은행은 대출 이자를 통해 수익을 확보한다. 제작사·배급사·금융기관이 리스크를 분담하는 구조다.
물론 이 제도 역시 단점이 있다. 일반 대출보다 이자 부담이 크고, 제작 일정이 지연되거나 예산이 초과될 경우 배급사가 제작 통제권을 회수(테이크오버)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제작위원회와 미국의 완성보증제도는 IP 권리 확보와 리스크 분산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는 IP 권리를 대부분 넘기고 리스크를 회피하는 글로벌 OTT 중심 투자 방식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전문가들은 해외 사례를 참고해 한국형 콘텐츠 금융 모델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제작사가 IP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흥행 리스크를 분담할 수 있는 새로운 자금조달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성진 숭실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리스크 분산 없이 지속 가능한 산업은 존재할 수 없다”며 “리스크가 한쪽에만 집중되면 보수적인 콘텐츠만 양산돼 혁신적인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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