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인텔·AMD·엔비디아, 심상치 않는 연합…‘미국형 반도체 블록’ 부상 [소부장반차장]

김문기 기자

‘인텔 파운드리 다이렉트 커넥트 2025(Direct Connect 2025)’에서 오프닝 키노트에 나선 립부 탄(Lip-Bu Tan) 인텔 최고경영자(CEO) [사진=인텔]

[디지털데일리 김문기 기자] 미국 반도체 판도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인텔은 엔비디아와 기술·자본을 묶는 동맹을 공식화했고, AMD와는 파운드리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직접 인텔 지분을 확보하며 대주주로 개입하면서, 전통적 경쟁자들이 한 축으로 모이고 국가가 이를 매개하는 ‘미국형 반도체 블록’의 형성이 가시화되고 있다.

앞서 지난 9월 18일 인텔과 엔비디아는 공동 성명을 통해 협력 방안을 공개했다. 양사는 인텔의 x86 아키텍처와 엔비디아의 GPU 칩렛을 결합한 PC용 시스템온칩(SoC) 개발, 그리고 엔비디아 데이터센터를 겨냥한 맞춤형 x86 CPU 설계에 나서기로 했다. 동시에 엔비디아는 인텔 보통주 50억달러를 매입해 주요 주주로 올라섰다. 기술 제휴와 자본 결속이 동시에 이뤄진 셈이다.

엔비디아 젠슨 황 CEO는 “AI가 실리콘에서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재구조화하고 있다”며 “인텔과의 협력은 AI·컴퓨팅 스택을 더 긴밀히 결합하는 역사적 제휴”라고 강조했다.

인텔 립부 탄 CEO 역시 “인텔의 x86 아키텍처는 현대 컴퓨팅의 기반이었고, 우리는 공정 기술과 제조, 패키징 역량을 통해 엔비디아의 AI 리더십과 결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협력은 양사의 단순한 사업적 이해관계를 넘어선다. 엔비디아는 x86 생태계에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했고, 인텔은 경쟁사로부터 직접적인 신뢰를 얻음으로써 고객 기반 회복의 기틀을 마련했다. 무엇보다 두 회사 모두 미국 내 생산 체제를 강화하려는 백악관의 전략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도 크다.

올해 3월 취임한 립부 탄 인텔 CEO의 행보도 주목된다. 그는 취임 직후 임직원 서한에서 “인텔은 미국 기술 리더십과 국가 안보, 경제적 힘을 회복해야 한다”고 밝히며, 무리한 팹 확장이 아닌 ‘고객 확보와 수요 기반 투자’ 원칙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차세대 18A 노드 운영에 충분한 고객 수요가 확보되지 않으면 생산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리사 수 AMD CEO(좌)와 샘 알트만 오픈AI CEO가 서로를 반기며 포옹하는 모습

아울러 1일(현지시간) 인텔이 엔비디아에 이어 오랜 경쟁자인 AMD를 파운드리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협상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통적인 반도체 경쟁 구도가 무너지고, 미국 내 생산 중심의 새로운 산업 블록이 형성되는 과정을 입증한 셈이다.

해외IT전문매체 세마포에 따르면 인텔은 AMD와 생산 위탁 협력을 논의 중이다. 아직 초기 단계로 물량이나 공정 범위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협상이 성사된다면 AMD가 대만 TSMC에 전적으로 의존해온 위탁 구조에 균열이 생긴다. AMD는 미 정부의 대중 수출 규제로 직격탄을 맞은 이후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가 절실한 상황이다. 인텔을 보조 생산 거점으로 확보한다면 미 백악관과의 관계 관리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인텔 내부 사정 또한 절박하다. 립부 탄 CEO는 차세대 18A 노드 운영을 위해 충분한 고객 수요가 확보되지 않을 경우 생산을 중단할 수도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AMD가 일부 제품군이라도 물량을 맡긴다면, 인텔은 수율 안정화와 공정 신뢰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최소 수요’를 채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역할은 더욱 두드러질 수 있다. 백악관은 인텔 지분 9.9%를 직접 확보해 최대 주주 반열에 올랐다. 단순한 보조금이나 세제 혜택을 넘어, 정부가 정책·자본·거버넌스를 모두 관여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한 것이다. 여기에 엔비디아·AMD 같은 주요 기업이 인텔에 협력 채널을 열면, 미국은 정책·자본·고객을 모두 묶는 ‘미국형 반도체 블록’을 제도화할 수 있게 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윌라드 호텔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리셉션에 참석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포옹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다만 불확실성은 남아 있다. 인텔의 18A, 14A 등 차세대 노드는 여전히 수율과 안정성에서 검증이 필요하다. 경쟁자와 고객 관계가 동시에 얽히면서 반독점 이슈나 공정성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장기적으로는 인텔이 기술적 신뢰성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번 동맹 구도는 또 다른 ‘정책 드라이브’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도 따른다.

물론 ▲엔비디아와의 제휴 ▲AMD와의 협상 ▲미 정부의 직접 개입이 맞물리면서 인텔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산업 축이 자리잡고 있다. 단순 기업 간 거래가 아닌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국가 전략이 결합한 형태로 변모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도의 향방은 인텔의 기술 완성도에 달려 있다고 분석했다. AMD가 보조 생산이라도 문을 열고, 엔비디아와의 협력이 실제 제품으로 이어진다면 인텔은 다시 미국 반도체 산업의 중심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긍정적 신호도 읽힌다. 반대로 기술적 관문을 넘지 못한다면, 이번 블록 구상은 허상이 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김문기 기자
moon@ddaily.co.kr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디지털데일리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